돌아는게 상책

통제 성향일지도, 불안장애일지도 모르겠지만 규칙에 맞지 않는 것을 용납하는 게 유난히 힘들었다.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수학, 몰랐던 규칙을 이해하는 과학을 좋아했고, 이유도 없이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는 언어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함께 정한 무리의 규칙을 완력으로 부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 드는 남자애들이 극도로 싫었고, 교실의 규칙을 수호하기 위해...

<깃발들>의 수상에 부쳐

시상식에 다녀와서 2025년 6월 25일, 한겨레 사람과디지털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휴먼테크놀로지어워드에서 <깃발들>이 시빅테크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만들었던 서비스가 아닌만큼, 이 상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의 마음으로 수상을 대해야하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막상 행사에 참여하고보니 프로그램과 연사 구성의 성실함과 내용의...

인사말

읽는 것보다는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끔 기운이 난다면 써놓은 것들을 그려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마음이 흔들리고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내가 쓴 글들을 읽으며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돌이켜보니 누군가에게 읽힐 것을 기대하며 썼던 마지막 글이 벌써 2016년입니다. 그동안은 직장인으로서, 회사 생활을 열심히 했고, 때때로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글을...

단편 <잡초>

안녕 뽀리

2015년 7월 17일에 뽀리가 떠났다. 하루 종일 가족이 집을 비운 날 이후 스트레스가 컸는지 몸의 전반적인 기능에 문제가 생겼고, 이주일 정도를 크게 힘들어 했다. 허공을 보며 다 쉰 목소리로 앙앙 짖던 뽀리를 뒤로 출근했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울먹이는 누나 목소리로 뽀리가 막 떠났다고, 전화를 받았다. 회의실에 들어가 잠깐 울곤, 습관으로...

80만원짜리 안경을 샀어요.

난 습관처럼 '가난'을 떠들고 다닌다. 뭣만 하면 '가난해서 그래요.'라고 하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대부분 돌아오는 대답은 '다들 그 정도는 힘들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나의 가난에 대해서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했다. 모두가 가난한 시대, 가난하다는 것이 체면치레이자 겸손인 시대에 살면서 누군가의 가난하다는 말이 그저 유세로...

드로잉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어떤 영화를 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데에 제목과 포스터가 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영화는 꼭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제목의 공헌도가 높지만, 제목이 귀에 들리게 된 데에는 SNS와 여타 언론의 역할이 컸다. 몇 년 전부터 정치적 색을 띤 영화들의 상영관 확보에 대한 논란이 쌓여왔고, 이어져 온 관심이 이 영화를 통해 집중되고 있다. '배급사...

<Boyhood> 오늘의 불안이 내일을 살 위로가 된다.

최근의 영화들은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무언가를 때려 부수거나, 쉴 새 없이 싸우거나,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가득 채워 넣어야만 비로소 완성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블록버스터는 블록버스터이기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지만, 어째 블록버스터가 아닌 척하는 영화, 블록버스터일 수 없는 영화들도 급급하게 그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어렵더라도 믿고, 쉽다면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가 없던, 서로의 다름이 튀어 나오지 못했던 환경에서 이어져, 이미 너무 깊어 버린 인연들이 시간이 지나며 툭툭 삐져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마다 깊이 생각하는 걸 멈춘다. 짜증도 나고, 주위에 욕을 하면서 풀기도 하지만 결코 그 인연의 불만이 우리 인연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잊어버릴 수는 없다. 단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떤...

나침반

3년. 짧았던 시간에 비해 참 오랜 시간동안 아파했다. 아파했다는게 자랑도 아니고, 상대보다 내가 더 힘들었다는 치졸한 으스댐도 아니다. 그냥 내가 슬펐다. 슬픔에서 헤어나오기가 많이 어려웠다. 젊음으로 눌러 밟았던 상처들이 이때다 싶어 약해진 나를 뒤덮었고, 그 때 하필 아무도 내 곁에 없었던 것. 그게 한 없이 편안하게 했던 존재를 반복해서 떠올리게...

그냥 일이 하기 싫었다.

일을 하기가 싫었다. 날씨가 좋고, 주위엔 커피가 맛있는 카페가 많고, 쓰고 싶은 글과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다. 그러나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단순히 일이 하기 싫었고, 그래서 들었던 부정적인 감정이 가라앉은 감정들을 휘휘 저어 떠오르게 했다. 늙은 뽀리는 사람이 없는 집안을 불안한 마음으로 헤집고 다닌다. 눈이 멀어 실수로 똥과...

<아만자> 상상 속의 희망을 은유한 드라마

올레마켓 웹툰 김보통작가의 <아만자> 에 대한 감상입니다. 기나긴 서두때문에 놀라지 마세요. 이 글은 분명히 <아만자>에 대한 감상입니다. 돌이켜보자면 나는 원래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인형보다는 손톱깎이나 젓가락들로 인형놀이를 했고, 유치원에서는 친구들이 뛰어노는 점심시간에 혼자 교실에서 편지를 주구장창 쓰곤 했다. 그러나 10대를 지나오면서 물리적...

<Her> OS..! 널 사랑해!

수입된지 한참이 지나서야 지난 5월 22일 영화 <Her>가 국내에 개봉했다. 티져 영상의 화려한듯 따듯한 색감과 호아킨의 초록색 눈동자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또 무언가 이별 후의 마음을 달래줄 것 같은 기대로 마음이 한껏 부푼 상태였다. '이건 필시 엄청난 영화일거야!' 하는 말을 마음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OS와의 사랑이 주...

서교예술실험센터의 변모

2013년이었나? 마포구청의 새로운 정책수립에 따른 서교예술실험센터의 존폐를 놓고 예술인들의 대국민 호소가 있었다. 나는 당시에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한 상태였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의 움직임에 냉소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생계와 크게 관련 없는 일들에 에너지를 쏟는 모습에 나와는 결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1년여 만에 다시...

<Shameless> 가난과 가족, 그 지긋지긋한 것들.

회사 근처로 자취를 시작했다. 자주 가던 고려대 시네마트랩과 거리가 꽤 멀어져 버렸기도 했고, 첫 자취를 하느라 돈이며 시간이며 많이 모자랐던 탓에 최근에는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좁은 집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터라 늦은 밤에 혼자 무언가를 볼 수가 없었는데, 자취를 시작하면서 잘 보지않던 미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좀 적적한 탓도 있었지만....

단편 <♥>

<Punch-Drunk Love> 내면의 평화

<Her> 를 보려고 했지만, 왠지 그 영화만큼은 평온한 마음으로 보고싶었기에 예전에 구해둔 영화들을 뒤적거렸다. 세이무어 호프만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에, 그가 나왔던 영화 중 수작이라 불리우는 것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중에 언젠가 사람들에게 여러번 추천을 받았던 <Punch-Drunk Love> 를 보았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니었다면 답답해서 죽을 뻔...

아무것도 모르겠다.

퇴사 이후, 생각보다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할머니 생신겸 2박 3일동안 부산에 다녀왔고, 어떤 이유에선지 '돈을 많이 벌어야 겠다.', '나와 닮은 아들을 기를 수 있는 가장이 되어야겠다.'라는 다짐을 잔뜩 하게 되었다. 지금의 불안함을 기만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지난 일년 간 회사생활의 주 목적이 오직 돈이었다면, 나는 그...

<또 하나의 약속>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인간애의 현장

영상작업을 하던 당시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를 전공하고 영화를 제작하는 형을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다.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때 느꼈던 것은 생각보다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은 스토리텔러라기보다는 테크니션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약속> 은 그런 테크니션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지배하는 분위기와 정반대되는 대사나...

단편 <그게 말이가>

<About Time> 시련없는 교훈의 무의미함

나는 멜로 알러지가 있다. 딱히 멜로 영화를 싫어한다기 보다는 현재의 불만족에서 오는 피해의식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친구가 당당하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두번씩은 보았을 것이라던 <Love Actually>를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Love Actually> 의 감독 리처드 커티스의 신작 About Time을 보았다. 지난 번, 영화 마스터에 대한...

<변호인> 민주주의, 민주주의.

"좌파, 진보세력을 운운하며 노무현 전대통령을 좋아하거나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감상적으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감상적인 태도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용산사태를 묵인하고 폭력진압을 용인했던 노무현 전...

숫사자의 얘기는 누구도 필요치 않는다.

숫사자는 강한 가부장의 상징으로 소비되곤 한다. 남성적인 갈기, 강한 육체, 많은 수의 암컷을 거느리는 정력. 암컷이 사냥해온 먹이를 누구보다 먼저 먹는 가부장이며, 자식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이다. 최근에는 '사냥을 하지 않는 숫사자가 가정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암컷에게 무력한 바가지 긁히는 숫사자의 사진이 유머 소재로 나돌거나,...

몸을 떠난 욕망

본능적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무튼 이유없이 이미 좋아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또 좋아한다 믿었지만 사실은 그렇지않은 것들이 있다. 욕망은 삶을 뛰게하는 원동력이지만 대부분의 욕망은 내게서 시작된 것들이 아니었다. 수 많은 관계, 수 없이 반복되어온 교육과 폭력이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의 욕망을 품게 만들었다. 내 밖에 있는 모든 타자의 욕망은 나를...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다.

늘 말은 쉽다. 쉽게 얘기하지만, 실상 내 삶을 되돌아보면 나는 다양한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있구나 절감하게 된다. 가져야할 것들이 이 만큼, 아직 누리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것들이 저 만큼. 이미 보편적이고 안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삶에서 이만치나 떨어져 나온 주제에 욕망은 쉽게 타인의 삶에서 떨어져나오질 않는다. 그나마 즐거운 것, 웃으면서...

노란 풍경

단지 말일 뿐인데도 마음에 와닿지않으면 입에서 발화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동안 그런 상황은 '나는 솔직하니까.'라는 이유를 업어 긍정으로 수렴되곤했는데, 말이 그저 말뿐임을 상기하면 솔직하다는 말 보다는 미숙하다거나 아둔하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했든 아니든 필요에 따라 말은 경험을 편집하고 마음을 왜곡하며, 솔직하게...

<케빈에 대하여> 환경과 개인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잘못된 것에 대한 기대가 삶을 지집 진하게 붙잡고 늘어지게 했다. <케빈에 대하여>는 엄마 '에바'의 시각으로 사건을 설명함으로, 모자관계 속에서 원인을 찾고자 한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 <Elephant> 에서만 해서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을 개인의 죄악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