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민주주의, 민주주의.

“좌파, 진보세력을 운운하며 노무현 전대통령을 좋아하거나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감상적으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감상적인 태도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용산사태를 묵인하고 폭력진압을 용인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그의 변호사 시절을 포함한 모든 생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일축할 순 없지않느냐는 것이었다.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아 엄마와 누나와 <변호인>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헌정’되듯이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만들어진다면 더더욱이나 말이다.

<변호인>을 보고 싶었던 것은 순전히 배우 송강호의 정의로운 연기는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였는데, 현재의 시국과 맞딱뜨려 <변호인>은 예상치 못한 큰 감동을 선물했다.

민주주의.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철도파업을 둘러싼 진영간의 대립이 극심해지고 있는 가운데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대립을 진보와 보수의 가치충돌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 갈등에 가치적판단은 존재치 않는다.

파업으로 대표할 수 있는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시급 오천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직장에서 연차와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현재의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배웠듯이 자본주의 경쟁에 의한 것이 아닌, 노동운동의 결과였다.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자 하는 지금의 공안정세가 우리 개인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그땐 그랬더랬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우리의 어두운 역사를 영화는 상세하게 나열했고, 자칫 영웅화되고 신화화될 수 있었던 주인공은 역사적 사건들 앞에서 시종일관 겸손하게 물러나 있었다.

일베라는 커뮤니티로 대표되는 ‘보수’ 혹은 ‘우익’이라 자처하는 세력, 그들 중 특히나 젊은 세대에게 이 영화가 역사를 되짚어볼 기회를 제공했으면 한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싸움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가치의 충돌은 존재치 않는다. 단지 권력 앞에 모든 개인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민주주의를 지키고자하는 투쟁만이 있다.

인간이 무너진 세상에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 <변호인>은 인간이 무너졌던 역사를 보여줌으로 ?인간을 무너뜨리려는 지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생각케 했다.

아울러 12월 28일은 총파업의 날이다. 꽤나 마음이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