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는게 상책
통제 성향일지도, 불안장애일지도 모르겠지만 규칙에 맞지 않는 것을 용납하는 게 유난히 힘들었다.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수학, 몰랐던 규칙을 이해하는 과학을 좋아했고, 이유도 없이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는 언어를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함께 정한 무리의 규칙을 완력으로 부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 드는 남자애들이 극도로 싫었고, 교실의 규칙을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선생님의 앞잡이가 되었지만, 그런 선생들마저도 규칙과 책무를 져버리는 모습을 보일 때면 서슴없이 공격해서 교무실에 끌려가기 일쑤였다. 삶의 불확실성과 나라는 존재의 중요하지 않음을 대학 교육을 통해서야 겨우 이해했고, 이해했기 때문에 납득하기보다는 좌절했다.
그랬기에 회사 생활을 하는 것보다 연구자가 되리라 생각했다. 예술 역시 일종의 연구이자 수행이었지만, 또한 예술은 삶의 불확실성에 뛰어드는 일이라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다행히도 내 예술보다 내 삶이 더 불확실했고, 내던져진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꿈꿔본 적도 없던 직장인이 되었다. 직장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걸 알아내는 데에는 그래도 몇 년은 걸렸을 테지만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혼자 감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포근한 부분이 있었다. 서로서로 싫어하는 만큼 서로의 부족함을 용인했고, 뜬구름 같지만 성장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거시적인 계획도 매해 새로 정해줬다. 정기적으로 입금되는 월급은 개인적인 삶의 계획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발판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십수 년을 보낸 지금에는 어느 정도 유연하게 불확실함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도 같다.
겨우 익숙해질 때가 되었나 싶었더니, 이제는 회사 생활 마저 불확실한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개발자로서 AI 시대를 바라보는 것은 자동차의 등장을 바라보면 마부의 모습일 지도 모른다. 내가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온 일이 하루아침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확실함 앞에 몸을 맡기고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다는 묘한 기대감도 있다. 선택의 시기, 새로운 변곡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미래가 불안하다는 사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의 내 선택이라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지금까지 내가 일군 경제적 자산, 내가 하는 일을 응원하는 친구들, 들을 만한 이야기를 나누어줄 동료, 실패하고 돌아와도 내 노력을 함께 알아줄 사랑하는 사람,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지난 내 선택으로 쌓여있다. 새로운 불안감은 그렇게 기대감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직진으로 살아본 적 없는 궤적이 되어버리고야 말았지만, 구불구불 간다고 해서 거기에 풍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불구불 여러 변곡점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혹은 심혈을 기울여서 했던 선택의 흔적이 서려 있다. 미래가 불안하고 어지러울 때 굽어진 지난 길을 돌아보면 어떻게든 또 선택을 해낼 것이라는 안정감이 든다. 체력이 달리고 마음이 떠다니는 시기에는 또 해야 할 선택들이 남아있다는 게 아득해질 때도 있긴 하다. 어쩌겠는가, 어차피 쾌적하게 의심 없이 직진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