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환경과 개인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잘못된 것에 대한 기대가 삶을 지집 진하게 붙잡고 늘어지게 했다.

<케빈에 대하여>는 엄마 ‘에바’의 시각으로 사건을 설명함으로, 모자관계 속에서 원인을 찾고자 한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 <Elephant> 에서만 해서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을 개인의 죄악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시각이 새롭게 와닿았지만, <케빈에 대하여>에 와서는 오히려 그러한 시각이 더 답답한 현실을 대면하게 했다.

아마도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다루는 것, 결국 사랑의 실패가 야기한 결핍이 대를 이어 미친 영향,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라 나의 맥락에 연관지어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충격적이다.‘에서 ‘절망적이다.‘가 되어버렸다.

불운한 환경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가. 지극히 한국적인 답처럼, 한국에서 주류 사회 밖에 태어나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결과는 그런 것인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인가.

몸을 떠난 것을 욕망하는 순간, 이미 그 노력은 잘못된 방향이었나. 나와 내가 가지게 되어버린 욕망간의 간극, 포함되지 못한 자의 삶은 포기하고 버려가는 것일 뿐인가. 우스갯 소리로 삶의 진실이 결국 추락이라면 시작이 낮은 사람은 삶의 끝에 더욱 빨리 도달하는 것이니 결국엔 성공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고,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은 환경을 극복한 사람이라 친구는 말했다. 의심이 많은 나는 거기에 대고 의문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