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meless> 가난과 가족, 그 지긋지긋한 것들.
회사 근처로 자취를 시작했다. 자주 가던 고려대 시네마트랩과 거리가 꽤 멀어져 버렸기도 했고, 첫 자취를 하느라 돈이며 시간이며 많이 모자랐던 탓에 최근에는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좁은 집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터라 늦은 밤에 혼자 무언가를 볼 수가 없었는데, 자취를 시작하면서 잘 보지않던 미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물론 좀 적적한 탓도 있었지만.
총 세 종류의 미드를 보고 있는데 하나는 현재 시즌4가 진행중인 <Game of Thrones>이고, 하나는 <Modern Family>, 그리고 마지막으로 <Shameless>다.
오늘 쓸 글의 주인공은 <Shameless>이다.
나는 가족이라는 소재에 꽤 집착하는 편이다. 가족에 관련된 작품을 볼 때, 아름다운 가족에 대한 기대보다는 ‘가족의 실패’를 기대하곤 한다. 대부분의 예술은 비관 속에서 발버둥치는 삶의 의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가족의 실패’라는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 환장하는 진정한 이유는 아름다운 가족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마냥 아름다운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가족 안에서 겪은 이해할 수 없거나 괴로웠던 것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면 그에게 가족은 트라우마의 근원일 것이다. 부부싸움의 주된 주제가 돈인 문제나,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나이에 부모와 자식간의 이해관계에서 오는 문제는 가족이 자본주의적 억압의 핵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의 언약,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수 없이 재생산된 ‘가족’이라는 낭만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전혀 다른 사람은 두 객체를 법적으로 구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완벽히 준비된 훌륭한 부모를 둔 가정에서 태어나면 좋겠지만, 결코 완벽할 수 없는, 한 번도 연습해본 적 없는 부모 역할을 단번에 훌륭히 해낼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족 외에도 법적으로 한 공간에 묶어놓은 생활의 부당함을 우리는 12년의 공교육에서 겪어본 적 있다. 학교는 좁은 곳에 혈기왕성한 어린 친구들을 가두고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아이들을 억압한다. 학교 생활에서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친구와 같은 반이 되거나 폭력적인 선생을 만나 너무나 괴롭다면 하다 못해 자퇴라도 하면 된다. 그러나 가족은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가족은 오랜 시간동안 개인을 억압해왔고, 서로를 아프게 했고, 앞으로도 수 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족을 향한 애잔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여전히 가족이라는 환상을 기대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함께 해 온 시간은 외로운 인간이 외면하기에 마음 아픈 어떤 것이 있다. 아무리 미워해봐야, 아무리 원망해봐야 이미 30년을 함께 해온 내 어머니고, 내 아버지고, 내 누이기에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Shameless>는 이런 가족의 지긋지긋한 애증 속을 휘젓는 드라마다.
가난하고 무책임한 부모 아래에 태어나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사는 가난한 여섯명의 아이들과, 그들의 아버지인 프랭크 갤러거, 그리고 많은 주변 인물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각 구성원들의 여러 이야기들을 다룬다.
여섯 아이들이 각각 상징적인 인간상들 - 게이, 반사회적 장애, 애정결핍, 비뚤어진 천재 등 - 을 대표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동안, 이 알콜중독 아버지 프랭크 갤러거는 마치 악역인 양 머물다 삶의 불합리에 노출된 여섯 아이들을 길들이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 - 법과 제도- 의 모순과 이기심을 주정인듯 관객 앞에서 떠든다. 겨우 무책임한 알콜중독자인 프랭크 갤러거가 깜짝 놀랄만큼 유식한 말들을 줄줄 욀 때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건, 아마도 그가 작가 - 혹은 감독 - 의 현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충 적었지만 이미 이 갤러거 가족이 얼마나 막장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 얼굴을 소변을 누고, 엄마가 딸의 남자친구와 자고, 남자친구가 차도둑이라는 것에 안심하는 이 엉망진창인 가족은 그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결국 그들의 가족으로 돌아온다. 도무지 다시 얼굴을 맞대고 싶지않은 사건들이 빈번하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마냥 ‘그럴 수도 있지.‘하며 받아들여 버린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뜨악하는 풍경에서 놀란 가슴을 잠재우고 나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족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족이라면 이러이러해야한다.‘라는 알량한 기대때문이라는 걸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그저 사람이 함께 사는 것, 외롭고 버거운 삶 속에서 다른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기로 약속하는 것.’
그렇게 가족을 새로이 정의한다면 애증에서 증을 조금은 놓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