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더라도 믿고, 쉽다면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가 없던, 서로의 다름이 튀어 나오지 못했던 환경에서 이어져, 이미 너무 깊어 버린 인연들이 시간이 지나며 툭툭 삐져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마다 깊이 생각하는 걸 멈춘다. 짜증도 나고, 주위에 욕을 하면서 풀기도 하지만 결코 그 인연의 불만이 우리 인연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잊어버릴 수는 없다.

단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기에 오는 불만은 내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온 것이기도 하다. 나의 불만이 클 수록 상대도 나로 인한 불만을 참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 인연이고, 그래서 인연인 것이다. 이어 나가겠다는 의지가 관계 속에 없었다면 그 관계는 애초에 끝이 났을 테니까.

나는 어떻든 의지를 이어 나가려는 편이다. 자기애적 관점으로 보일까봐 항명하자면, 좀 호구거나, 이미 맘 떠난 사람 붙잡고 늘어지는 피곤한 부류다.

주위의 사람을 돌보는 게 무척이나 서툰 덕에 사람이 많지가 않고, 그럼에도 인연이 된 사람들은 관계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게 먼저 다가와 준 사람들이다. 크게 잘난 것 없고, 크게 자상하지도 않은 내게 먼저 손을 건네준 인연을 나의 불만으로 모조리 나쁘게 생각하기가 무척 어렵다. 사람의 마음이야 변하지 않을 리 없는데, 내가 느낀 인연의 긍정적이었던 부분이 어딘가에는 영원히 숨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늘상 하고 있다. 때문에 관계에서 불만이 생기는 건 일단 내 탓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병신짓까지 하곤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관계에서 생긴 불만을 일단 상대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는 수 없이 상대의 잘못임을 발화하며 스스로를 설득할 근거를 수집한다. 목적이 우선시 되는 여정에서 ‘그저 다르기 때문에 느낀 불만’은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봐온 확실한 증거’로 둔갑한다.

한 번이라도 자신이 깔아놓은 레일을 벗어나 보았다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그렇지 않았던 상대가 불편해 졌을 때엔 상대가 이상하다고 단정하기 이전에, 무엇이 문제가 되었을지 관계 속에서 고민해 보았어야 했다.

어느새 나는 상대에게 ‘구린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내가 저평가를 받는다는게 불편한게 아니라, ‘그저 다르기 때문에 느낀 불만’만이 그 근거가 되는게 부당하고 편협하다고 느꼈다.

당사자야 그럴 수 있었다 치자. 나 역시 쌓인 불만으로 상대를 대했고, 그로 인해 관계가 삐걱거려왔다고 물러서자. 그런데 나를 잘 모르는 상대와 얘기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빌어 나에 대한 이야길 듣게 될 때가 있다. 너무 멀리 엇나가 있어 어리둥절하다.

빈 데가 있으면 메우고, 틀어진 데가 있으면 바로 놓는게 성격인지라 그냥 놓고 볼수는 없었지만, 산더미 처럼 쌓인 증거들 앞에 모든 말은 그저 나약한 변명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쌓아놓고 헤쳐보라는 태도 앞에 나도 내가 소중해질 때가 됐다.

가까이 있는 것들의 단점은 쉽게 보이고,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고 반성해보는건 어렵다. 다만 어렵더라도 믿고, 쉽다면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킨 것들이 훗날 나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기꺼이 나도 그래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사람은 다르니까. 그게 그저 내게 쉬운 방식이었을 수도 있겠다. 내 성격이 그러해서 선택한 내게 쉬운 변명이었을 수 있겠다. 내게 쉬운 방식이 나를 힘들게 하는 때가 되었었고, 내게 설득력 있는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는게 많이 어렵다.

사람도 변하고 관계도 변한다. 내가 느꼈던 인연의 긍정이, 때로는 모두 닳아 없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