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hood> 오늘의 불안이 내일을 살 위로가 된다.
최근의 영화들은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무언가를 때려 부수거나, 쉴 새 없이 싸우거나,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가득 채워 넣어야만 비로소 완성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블록버스터는 블록버스터이기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지만, 어째 블록버스터가 아닌 척하는 영화, 블록버스터일 수 없는 영화들도 급급하게 그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텔레비전에서는 갖은 종류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아닌 척’하는 판타지들을 쏟아내느라 바쁜데, 수고스럽게 찾고 기대하며 만나는 영화라면 그보다는 선택의 폭이 넓어야 하지 않을까.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무지막지하게 화려한 타인, 혹은 다른 세계의 삶에 노출되고 나면, 상대적으로 추욱 쳐져 버리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열심히 살아도 영 심심한, 염원해도 도무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서 언젠가 빵하고 쏟아져나올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판타지일 뿐, 삶을 긍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힘들 때에 그저 위로를 받고 싶어 꺼낸 얘기에 질타나 늘어놓는 가족이나 친구들처럼, 영화관 스크린 앞에서 어째 번지수를 잘못 찾은 느낌이 드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갔다. 없어지는 홍대 앞 단골 가게들처럼, 내가 편한 세계가 점점 더 찾기 어려운 곳으로 쫓겨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Boyhood> 를 보고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다.
사실 보고 나니 내가 뭘 봤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6살 때 캐스팅된 한 소년과 12년 동안 촬영을 하였다지만, 배우가 바뀌지 않는 것 외에는 그 노력을 들여 무엇을 만들어낸 건지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 도대체 감독은 어떤 사람이기에 12년 동안 이렇게까지 담담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분명히 어딘가에서 몰래 닌자거북이 같은 영화를 몇 개나 만들어 왔던 건 아닐까 하는 망상도 하게 된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음에도 ‘좋은 세 시간을 보냈다.’ 라는 감상은 왜 남은 걸까. 아마도 12년의 삶을 돌아보는 나이 든 소년의 시선에서, 나도 나의 삶을 같은 시선으로 돌아봤기 때문일 것이다.
<Boyhood> 는 소년의 삶 속 사건들을 다루지만, 어떤 사건에도 극단적으로 몰입하지 않는다. 무언가 일어나다가도 장면이 바뀌고 또 한 번 외모가 변한 소년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굳이 말하거나 눈앞에 들이밀지 않아도, 소년이 그에게 어려웠을 일들을 무사히 이겨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일 것이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과거를 돌이켜보면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아주 많이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지만, 그 감정은 쉬이 되돌려지지 않은 채 그랬던 사건만이 기억이 난다. 심하게는 왜 그런 일로 그렇게 힘들었나 하는 의문마저 생길 때도 있다. 감정이 희석된 뒤의 관조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쓰다듬어 준다. 오늘의 불안도 언젠가는 내일을 살 위로가 될 것이다.
우울함과 불안은 마음이 균형을 잃을 때에 쏟아진다. 부정적인 생각에 기울어질 때면, 좀 심심한 오늘이 영원한 미래가 되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거나, 내가 열심히 해온 것들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냉정히 돌아보면, 내가 슬펐던 때에 그런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인연이 있었고, 때로는 슬픔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그저 즐거움으로 가득 찬 순간도 있었다. 머리를 털고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잃어버린 마음의 균형을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