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두 가지 도전
오랜 시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잘 해오던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고는 내가 잘 해낼 것 같지 않은, 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스멀스멀 요구받곤 한다. 몇 번은 어떻게든 해내고 만다. 때로는 번아웃도 오고 회복을 위해 물러서기도 해 본다. 그러나 도무지 그 요구는 줄어들지 않고 언젠가는 벽에 도달하고 만다. 조언을 구해보려 주위를 둘러보아도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모두 해내고 만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는 요구하는 회사조차 방법을 알지는 못한다. 조직은 방법을 설계하지 않은 채 결과를 요구하고, 그 공백은 쉽게 개인의 책임으로 남는다. 답답하다. 이런 상황을 대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침잠하는 것이다. 비용 대비 효율의 저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더 이상 확장을 시도하지 않고 현재의 역할 안에서 효율을 유지하는 선택이다. 지금껏 내가 이룬 것이 어떤 것들인지 관계없이 나에게 가해지는 새로운 꼬리표를 담담히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것은 구조와 환경이 만들어낸 변화이지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님을 상기한다. 한 켠 슬프기도 하지만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다. 자신도 이루지 못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인지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시도해 볼 수 있는 구멍, 내가 만들고 설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렇게 내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에 설레고 만다. 인간이라는 동물로 태어나 가장 즐거운 일은 내가 정성 들여 선택한 지금의 기회가 어떤 미래로 연결될지 겪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끝에 가서 실패한다고 해도, 내가 선택한 길에서 충분히 노력했다면 더 이상 탓할 곳이 남지 않기에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방법이 무조건 좋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일 외에 사용할 체력이 남아있어야 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고자 하는 것을 지지하고 도와줄 동료가 있으면 좋고, 설득할 만큼 회사의 목표와 정렬될 만한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고민이 많고 불안함이 큰 시기임에도 다행히 나는 그런 상황에 있다는 객관적인 중심은 잡을 수 있었기에 최근에는 몇 가지를 시도해 보려 하고 있다.
첫 번째, 무모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과제의 발의.
회사에서 내가 담당하는 서비스에는 고질적으로 저평가받는 항목이 있다. 사용자가 자신의 바쁜 업무 중 우리 시스템을 통해 긴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특정 기능에 신속하게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서비스는 여러 기능을 품고 있는 플랫폼이고, 아무리 자주 사용되는 기능이라 하더라도 여러 조직, 여러 사용자가 엮여 있는 플랫폼의 특성상 너무 구체적인 기능을 플랫폼의 최상단에 노출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이를 LLM 기반의 챗봇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최근 AI 기반 에디터를 통해 코딩하고 있고, Agent와 Planning 기능을 사용하다 보면 굉장히 복잡한 요구를 높은 신뢰도로 달성하기 위한 채팅 형태의 UX 적 완성도가 꽤 무르익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플랫폼의 깊은 곳에 있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을 채팅으로 요청하고 피드백을 받도록 하여 기능의 구체성과 관계없이 빠르게 원하는 바를 소구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기에 적기이다.
다만 첫 시도는 리스크를 고려하기 보다는 가능성을 테스트하려 한다. 사용자의 가장 빗발치는 요구사항 한 가지를 빠르게 구현하고 테스트해 보는 것을 목표로 구성했다. 장기적으로는 주요 기능을 단계적으로 흡수하고, 더 나아가 경쟁업체의 동일 기능을 대체하는 수준까지 확장하는 것을 문샷—도달 불가능해 보이는 높은 목표—으로 설정했다.
회사의 요구와 맞아서 평가받기가 좋고, 기술적으로 흥미로워 나 자신과 동료의 동기부여에 역할 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혹시 내가 모자라 실패한다고 해도 최소한 발표 거리라도 만들 수 있는 좋은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곳저곳에 떠들고 다니다 보니, 기대하는 눈빛도, 같이하고자 하는 귀띔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두 번째, 경력 전환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도전.
나는 원래 무대 위에 서는 걸 좋아했다. 성악을 하던 시절에는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큰 성량으로 무대 아래의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즐겼고, 대학 시절에는 행사나 발표를 수도 없이 나서서 했다. 그러나 내가 당연히 잘 해오던 영역을 떠나서 일을 시작하면서, 꽤 오랫동안 배우고 쫓아가느라 이 업계에서의 무대에 오르는 일은 내게 가당치 않은 일로 여겨왔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굉장히 재밌는 상사 한 분을 뵈었다. 개발자 경력으로 시작해 교육자가 되신 분으로, 임원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방향에 대한 불만과 쓴소리를 가감 없이 하는 분이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회사 구성원들이 아끼는 회사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회사와 방향성과 하등 관계없이 새롭게 구축하고 도전하고 계셨다. 그중 하나는 회사 개발자들의 고민을 듣고 그것에 대해 라이브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대다 미팅을 진행하는 것인데 그를 통해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분은 기술자가 아니라, 조직의 고민을 해석해 주는 사람으로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를 보며 개발자로서의 기술만큼이나, 회사원으로서의 생활과 태도 역시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기술적으로 유별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무대에 오르는 일을, 회사원으로서의 이야기를 품는다면 좀 더 다양하고 와닿게 풀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바로 무대에 오를 수는 없을 테다. 그리고 막상 올라봤더니 처참하게 실패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대에 서기 전에, 타인의 고민을 구조화하는 연습부터 해보려 한다. 앞서 말한 상사분이 운영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여를 신청했다. 그리고 되도록 여러 명의 멘티를 만나 고민을 듣고, 그들의 고민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 바를 일반적인 경험으로 추상화하여 몇 개의 포스트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가능하다면 이곳뿐만 아니라 회사의 개발 블로그에도 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내 생각을 공적인 언어로 다듬고 활용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 막 첫 번째 과제를 시작하기 위해 구체적인 과제 설계서를 작성하고 있다. 설득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혹시나 내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어 나갈 수 있는 기술적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작성하는 과제 설계서가 기술적 기록이라면 이 글은 이 과제를 어떤 의미로, 어떤 다짐으로 시작하는가를 작성한 개인적 기록이다.
몇 달 동안 평가자는 몇 번이나 바뀌었고, 조직도 계속 흔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외부에서 명확하지 않은 요구를 받으며 두렵다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를 확장하는 기회로 활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구구절절 적어내는 것도 구체화함으로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다. 언젠가 다시 벽 앞에 서게 되고 흔들릴 때 방향을 되새길 수 있도록, 지금의 다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