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회사는 여러 사람들이 뭉친 찰흙마냥 덩어리져서 굴러간다. 나보다 덩어리의 욕망이 더 크다면 함께 굴러가는 수 밖에 없다. 계속 성장해라, 계속 더 벌어라, 더 큰 것을 욕망하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해라, 더 불 사르라, 그렇게 더 쟁취해라. 그런 말들에 파묻혀 굴러갈 때에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큰 덩어리 안쪽에서 스스로의 중심을 잡느라 소진되었고, 그 속을 뚫고 나오기가 막막했다. 당연히도 뭉쳐져 굴러가는 덩어리 속에서 누가 더 잘하고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다. 직접 발을 굴려 큰 덩어리를 굴리는 기똥찬 체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더 가깝고 애정하는 사람만이 겨우 눈에 띄고, 그는 곧 좋은 사람, 잘하는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다. 나쁘다, 못났다 욕했지만 그 자연스러움을 이해해버리고 난 뒤론 할 말이 남지 않았다. 나라고 지금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내 소속감이 그렇지 않게 보일 자신은 없다. 회사는 그런 곳이다.

그렇지 않을만한 곳, 조금은 다른 곳, 어쩌면 나와 좀 더 잘 맞을만한 곳을 찾아 여러번 옮겼다. 그 끝에 찾은 지금의 회사는 꽤 숨구멍이 큰 곳이었다. 더불어 굴러갈만 했다. 나도 그동안 꽤나 무거워 졌고, 같이 굴러가는 사람들도 방향성이 다르지 않았다. 때때로 애쓰지 않아도 눈에 띌 수 있었고, 억지로 기운을 내지 않아도 주위를 돌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회사의 환경도 몇 년을 가지는 못한 것 같다. 최근의 회사는 갑자기 더 많이 욕망하기 시작했다. 함께 페이스를 유지하던 동료들은 떠났고 덩어리의 숨구멍들은 욕심 가득한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부족하다, 달려야 한다,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더 많이 긁어모아야 한다는 소리만이 새로운 방향성이랍시고 얼기설기 채워졌다. 익숙한 패턴이다.

막막해졌다. 회사란 곳은 늘 그런 곳인 건가 낙담했다. 회사는 욕망하기 위해서 구성원을 다그치고, 계속해서 더 성장하라고 채찍질하지만 그 성장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못한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나? 더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사람들이 더 많이 환호할 만한 일을 해내야 하나?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뭔지 모를 무언가를 위해 어떻게든 나를 또 불태워야 하나? 그럼 내가 더 생존할 수 있는게 맞긴 한가? 나를 인정하고 알아줄까?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무턱대고 태울 체력도 예전만큼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인정받기 쉬운 익히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회사 밖에서 나만의 다른 답을 찾아야 하나,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질문들로 작년부터 지금까지 골머리를 썩고 있다.

13년차, 이제 작은 회사에서나 큰 회사에서나 걱정없이 시니어라고 불릴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누군가를 품어 내거나 이끌어야 하는 것에 대한 어색함이나, 내가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일까 하는 두려움 조차도 무색해졌다. 며칠 전에는 평소에 잘하는 후임이 반복해서 실수를 이어가기에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지금 너무 급한 것 같으니 천천히 하세요.”라고 했고, 다음날 마침 그때에 자기가 꽤 아팠었다고, 어디서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놀랐다고 했다. 나도 많이 성장했구나, 기억 속 다른 후임 하나는 이해되지 않게 모두를 몇년 동안 힘들게 했다. 팀장으로서 그가 다른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그러나 회사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회사는 마치 남일마냥 방관하는 동안 혼자 감당하느라 끙끙 거렸던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감사하다는 표현을 해주는 지금의 후임에게 고맙다고 느꼈다. 이런 시간이 좀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

맞아. 나는 사실 지금이 너무 좋아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지금이 좋고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료들과 고마움을 주고 받고, 서로의 의도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과제를 무리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해내는 지금의 토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이어가고 싶다. 그게 흔들릴까봐 불안하다. 다만 마냥 불안해해선 안되겠지. 이전에 비해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시니어다. 그저 시간만 쌓여 되어버린 시니어가 아니라, 시니어로서 여러번 채용되고 증명한 사람이다. 나를 비롯한 조금 더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보다 어려운 선택을 하고 방향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회사의 요구를 흡수하고 나만의 온도, 우리의 속도를 지켜나가는 것도 나의 역할이다. 이 불안을 이겨내 보겠다는 결정도 충분히 해내어 봐야겠다고, 다짐해 본다.